솔직히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예고편에 낚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윌 스미스가 총을 들고 괴물들을 쓸어버리는 장면만 잔뜩 보여주더니, 막상 보니 97분 중 액션 장면은 5분도 안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선택이 이 영화를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텅 빈 뉴욕, 혼자 남은 인간, 그리고 두 가지 엔딩. 특히 감독판을 본 뒤로는 한동안 이 영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혼자 남겨졌을 때, 인간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제가 직접 겪어보니, 반복되는 일상이 오히려 사람을 붙잡아준다는 걸 압니다. 11년째 같은 제조업 현장에 출근하면서, 매일 똑같은 루틴이 지루하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로버트 네빌(윌 스미스)은 인류가 사실상 멸망한 2012년의 뉴욕에서 혼자 살아갑니다. 아침마다 운동을 하고, 센트럴 파크에서 옥수수를 수확하고, 레코드 가게에서 마네킹에게 말을 겁니다. 그것도 매일, 3년 동안이나. 처음엔 그 장면이 조금 우스워 보였습니다. 마네킹한테 "내일은 인사할 거야"라고 말하는 게 뭔가 쓸쓸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요. 그런데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루틴이 바로 네빌의 정신줄이었던 겁니다.
이 영화가 다루는 핵심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심리적 고립(Psychological Isolation)입니다. 심리적 고립이란 물리적으로 혼자라는 상황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해줄 타인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인간이 겪는 정신 붕괴 과정을 말합니다. 실제로 극단적인 고독이 인간의 인지 기능과 감정 조절 능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어 왔는데, 단기간의 완전한 고립만으로도 환각, 인지 왜곡, 불안 장애가 심화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미국 심리학회 APA).
네빌이 마네킹 프레드를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앞에서 발견하는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입니다.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진짜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대답해"라고 총을 갈기는 장면에서 저는 그 처절함이 그대로 전달됐습니다. 제가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읽힙니다. 그건 미친 게 아니라, 3년간 쌓인 고독이 한계에 다다른 순간이었습니다.
영화에서 KV(크리핀 바이러스)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KV란 암 치료를 목적으로 홍역 바이러스를 유전공학적으로 개조한 바이러스인데, 투여 초기에는 10,009명을 완치시켰지만 변이를 일으켜 감염자를 빛에 취약하고 공격성이 극도로 높은 존재로 바꿔버립니다. 바이러스가 개발자의 이름을 따 명명된 것도 묘한 아이러니입니다. 치료를 위해 만든 것이 인류를 멸망시킨 원인이 됐으니까요.
이 영화에서 감염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일반적으로 좀비물에서 감염자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존재로 묘사되지만, 이 영화의 감염자들은 서열이 있고 무리를 이루며 감정적 반응을 보입니다. 우두머리 감염자가 햇빛에 피부가 타들어가는데도 자신의 짝을 되찾기 위해 네빌 앞에 나타나는 장면은, 그들이 단순한 좀비가 아니라는 복선입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전 인류 멸망 후에도 '정상적 일상'을 유지하려는 네빌의 심리적 생존 전략
- KV 바이러스의 변이 경로와 감염자의 흡혈귀적 특성(자외선 취약성, 야행성, 혈액 반응)
- 감염자들 내부의 사회성과 서열 구조, 그리고 감정 표현
극장판과 감독판, 같은 영화의 전혀 다른 결말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두 결말이 이렇게까지 다를 줄은 몰랐습니다.
극장판은 네빌이 자폭으로 감염자들과 함께 산화하는 결말입니다. 강화유리에 금이 가며 나비 모양이 만들어지고, 그걸 본 네빌이 딸을 떠올리며 희생을 결심한다는 구성입니다. 연출 자체는 감동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보이지만, 보고 나서 제 반응은 "이게 최선이었나?"였습니다. 우연히 나비 모양으로 금이 가는 것이 결정적 동기가 된다는 설정이 조금 억지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감독판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두머리 감염자가 강화유리에 손으로 나비를 그립니다. 그건 자신의 짝, 즉 네빌이 실험 대상으로 잡아둔 여성 감염자를 돌려달라는 의사 표현이었습니다. 이 장면 하나가 영화 전체의 의미를 뒤집습니다. 네빌은 그 순간, 자신이 3년간 내린 결론이 틀렸다는 걸 깨닫습니다.
바이러스성 뇌 손상(Viral Encephalopathy)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연결됩니다. 바이러스성 뇌 손상이란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뇌 기능이 손상되는 상태를 말하는데, 네빌은 KV 바이러스가 뇌의 고등 기능을 완전히 파괴해 감염자들을 인간으로 볼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감독판은 그 확신이 네빌의 편향된 관찰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감염자들은 무리를 이루고, 짝을 지키기 위해 전략을 짜고, 마네킹을 이용한 함정까지 설치했습니다. 이건 뇌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존재의 행동이 아닙니다.
그때 제가 느낀 건, 네빌이 오히려 이 영화에서 진짜 '괴물'에 가까운 존재였다는 점입니다. 인류를 구하겠다는 명분 아래 감염자들을 생포해 반복적으로 실험했고, 그 실험실 벽에는 실패한 피험자들의 사진이 빼곡하게 붙어 있습니다. 감독판 결말에서 우두머리 감염자가 실험실을 보고 경악하는 표정이 그냥 지나가는 연출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원작 소설인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의 핵심 주제의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인공이 살아남은 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보면 오히려 공포의 대상인 전설 속 괴물과 같은 존재라는 역설입니다. 극장판은 이 주제를 완전히 포기했고, 감독판은 해피 엔딩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그 주제를 살려냈습니다. 원작자의 의도를 어디까지 존중했는가의 차이가 두 결말을 갈랐습니다. 참고로 이 작품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tic) 장르, 즉 문명 붕괴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서사는 인간 심리와 사회 구조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자주 활용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 AMPAS).
이 영화를 아직 극장판만 본 분이 있다면, 감독판으로 꼭 다시 한번 볼 것을 권합니다. 같은 이야기인데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됩니다. 2022년 속편 제작이 확정되면서 감독판 엔딩이 공식 설정으로 채택된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겁니다. 저도 처음엔 극장판을 먼저 봤는데, 감독판을 보고 나서야 이 영화가 왜 지금까지 회자되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애드센스 거절 메일을 받고 글을 계속 써야 할지 고민하던 날 밤에 이 영화를 다시 봤는데, 텅 빈 도시에서 매일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던 네빌의 모습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습니다. 아무도 듣지 않더라도, 계속 신호를 보내는 것. 그게 전부일 때도 있으니까요.
참고: https://namu.wiki/w/%EB%82%98%EB%8A%94%20%EC%A0%84%EC%84%A4%EC%9D%B4%EB%8B%A4(%EC%98%81%ED%9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