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날 밤이었습니다.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칸에 타고 있는 걸까." 그날 저녁 다시 꺼내 든 영화가 설국열차였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이자, 커리어 최초의 영어 영화. 일반적으로 "헐리우드 진출작"이라는 수식어로 소개되지만, 제가 직접 다시 봐보니 이건 그냥 스펙터클한 SF 블록버스터가 아니었습니다.

기차 한 대에 압축된 계급구조, 예상보다 훨씬 날카로웠습니다
설국열차를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계급 갈등을 다루는 SF구나" 정도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보면서 이 영화가 얼마나 촘촘하게 설계되어 있는지를 새삼 실감했습니다.
영화의 핵심 장치는 열차 안의 수직적 공간 배치입니다. 꼬리칸(테일 섹션)에는 단백질 블록 하나로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이 가득하고, 앞칸으로 갈수록 스테이크, 초밥, 심지어 마약까지 즐기는 상류 계층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작동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인물의 위치, 의상, 조명, 배경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 언어를 말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칸이 바뀔 때마다 색감과 질감을 완전히 달리해 이 계급 차이를 말이 아닌 화면으로 증명합니다.
제가 특히 이입했던 장면은 커티스 일행이 유치원 칸을 통과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세뇌 교육을 받고, 그 아이들 중 일부는 기차의 부품으로 소모됩니다. 제 아이들이 언젠가 이런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순간, 분노보다 서늘한 무언가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영화의 계급 비판은 국내외 지식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자신의 저서 『21세기 자본』과 이 영화를 직접 연결하며 "지구온난화와 계급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 아직 안 본 사람은 꼭 보라"고 말했습니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소득 불평등 지수(지니계수)를 역사적 데이터로 추적한 책으로, 부의 집중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분석합니다. 지니계수란 소득 분배의 불평등 정도를 0에서 1 사이의 수치로 표현한 지표로,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심하다는 의미입니다. 설국열차의 열차 안 구조가 바로 지니계수 1에 수렴하는 세계의 시각화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오락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지표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제64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포럼 부문 초청
- 뉴욕타임스 '21세기 최고의 SF영화 TOP25' 선정
- 시카고 선타임스·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올해 최고의 영화 TOP10' 동시 선정
-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기생충은 인간사의 관점, 설국열차는 세계사의 관점에서 흥미롭다"
-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
일반적으로 한국 영화는 해외에서 '예술 영화'로 소비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설국열차는 그 틀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깬 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 제작비 437억 원을 투입해 할리우드 배우들과 협업하면서도, 봉준호 특유의 사회 비판적 시선은 전혀 희석되지 않았습니다.
시스템은 계속 달린다, 우리가 탄 기차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것은 사실 커티스의 폭동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윌포드가 커티스에게 진실을 털어놓는 장면, 즉 이 모든 폭동조차 시스템이 설계한 것이었다는 반전이었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알레고리(allegory)입니다. 알레고리란 표면적인 이야기 아래 다른 층위의 의미를 숨겨놓는 서사 기법으로, 설국열차는 열차라는 폐쇄 공간을 현대 자본주의 사회 구조의 알레고리로 활용합니다. 쉽게 말해, 열차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축소판이라는 뜻입니다.
회사 조직에서 일하다 보면 이 알레고리가 피부로 와닿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효율성과 규격이라는 이름의 궤도 위에서 앞칸을 향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시스템이 흔들릴 것 같으면 누군가 적당히 폭동을 허용해 압력을 해소한 뒤 다시 달리게 만드는 구조. 제가 직접 조직 생활을 겪어보니,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들이 허구의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도 흥미롭습니다. 일각에서는 이 영화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플롯을 해체·재구성한 것이 아니냐는 팬이론이 존재할 만큼, 구조적 완결성이 높습니다. 'W'를 상징으로 쓰는 절대 권력자의 공간을 주인공이 탐험하며 동료들이 탈락하고, 마지막 생존자가 그 의지를 계승한다는 서사 골격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르고호 원정에서 이어지는 유서 깊은 플롯이기도 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2013년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2016년에는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Officier)를 수상했습니다. 오피시에란 프랑스 문화예술 분야의 공헌자에게 수여하는 훈장 등급으로, 문화·예술·문학 발전에 기여한 외국인에게도 수여됩니다. 설국열차가 단순히 흥행작에 그치지 않고 국제적인 문화 외교 자산으로 기능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출처: 프랑스 문화부).
한국 영화 산업 측면에서도 이 작품의 의미는 큽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설국열차 이후 한국 영화의 해외 공동 제작 비율이 꾸준히 상승했으며, 이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됩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설국열차는 특히 다음과 같은 분들에게 강하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 조직 생활을 하며 "이 시스템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인가" 의문을 품어본 적 있는 분
- 봉준호의 기생충을 재밌게 봤지만 그 전작은 아직 못 보신 분
- SF 장르이지만 세계관보다 인간 군상에 더 집중하는 영화를 선호하시는 분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 볼 때는 "잘 만든 액션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이 영화가 말하는 것들이 오히려 지금 더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설국열차가 개봉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기차는 지금도 달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앞칸과 꼬리칸으로 나뉘어 있고, 우리는 어느 칸에 앉을지를 두고 매일 경쟁합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셨다면, 지금 보셔도 전혀 늦지 않습니다. 다만 양갱과 함께 보시는 건 제 경험상 그다지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C%84%A4%EA%B5%AD%EC%97%B4%EC%B0%A8(%EC%98%81%ED%9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