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엔 그냥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류작이려니 했습니다. 재난 이후 배경에 비슷한 느낌의 포스터, 제목도 어딘가 비슷하고.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 "이건 결이 다른 영화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폐허 속에서도 시장이 열리고, 거래가 이루어지고, 권력이 생겨난다는 발상 자체가 꽤 날카롭게 박혔습니다.

무너진 서울, 그래도 '마켓'은 열린다
대지진 이후 모든 문명 인프라가 마비된 서울을 배경으로 합니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단순한 생존극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화폐 기능이 사라진 사회에서 사람들이 선택한 건 물물교환, 즉 바터 시스템(Barter System)이었습니다. 바터 시스템이란 화폐 없이 물건과 물건, 혹은 물건과 노동을 직접 교환하는 원시적 거래 방식으로, 현대 경제학에서는 화폐 이전 단계의 교환 경제를 설명할 때 쓰는 개념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권력 구조를 만들어낸다는 점입니다. 희소 자원을 독점한 쪽이 가격 결정권, 즉 프라이싱 파워(Pricing Power)를 쥐게 됩니다. 프라이싱 파워란 시장에서 가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데, 쉽게 말해 "내가 값을 매긴다"는 뜻입니다. 영화는 이 구도를 폐허 속에서 아주 노골적으로 펼쳐 보입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부분이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느껴진다는 겁니다. 마트에서 생수가 동나던 코로나 초기, 마스크 한 장이 수천 원을 넘던 시절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결국 희소성을 쥔 쪽이 가격을 정했으니까요. 영화가 픽션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행동을 연구한 사회학자들에 따르면, 재난 직후 자원 독점과 비공식 교환 경제가 빠르게 형성된다는 점이 반복적으로 관찰됩니다(출처: 국립재난안전연구원). 영화가 그냥 만들어낸 설정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공동체라는 말이 가진 이중성
영화가 던지는 진짜 질문은 여기서부터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공동체는 정말 모두를 위한 것인가?" 저는 이 물음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봅니다.
마켓이라는 공간은 표면적으로 공동체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거래하고, 규칙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특정 집단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자본이란 신뢰, 네트워크, 정보 접근성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질적인 이득을 만들어내는 관계 자원을 의미합니다. 영화 속 마켓에서는 이 사회적 자본을 가진 자들이 약자를 배제하거나 착취하는 방식으로 질서를 유지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도는 우리 일상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이른바 '인맥'이라고 부르는 것, 정보를 먼저 얻는 위치, 누구와 연결되어 있느냐에 따라 같은 노력도 다른 결과를 냅니다. 영화는 그걸 폐허라는 극단적 무대 위에 올려놓고 보여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콘크리트 마켓>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가장 크게 갈라집니다. 전작이 '배제'를 다뤘다면, 이 영화는 '착취 구조'를 다룹니다. 배타적 생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환이라는 이름 아래 어떻게 착취가 정당화되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한국 영화 산업 전반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회 비판적 서사를 장르 영화 안에 녹여내는 방식은 한국 영화의 강점으로 꾸준히 언급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한국 영화는 국제 시장에서 사회적 메시지와 오락성을 결합한 장르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또 한 가지, 저는 이 영화가 마냥 무겁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상황은 극단적이지만, 인물들의 반응이나 대사 안에 묘하게 웃음이 끼어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세상이 무너진 뒤에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질서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엉뚱하게 인간적인 면이 튀어나오는 부분이 오히려 몰입감을 높입니다. 너무 심각하게 가지 않으니까 오히려 생각할 여지가 생기는 역설이랄까요.
"이 영화에서 나라면 어디까지 팔 수 있을까"라는 질문, 저도 보는 내내 계속 하게 됐습니다. 그 불편함이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혹은 재난 영화는 좋아하는데 너무 자극적인 건 부담스러운 분이라면 이 영화가 잘 맞을 겁니다. 단, "사람들은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라는 가벼운 질문 하나만 들고 들어가시길 권합니다. 그 질문 하나가 영화를 훨씬 더 재미있게 만들어 줄 겁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이미 보셨다면 세계관의 연결 지점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으니 그냥 넘기지 마세요.
참고: - 국립재난안전연구원: https://www.ndmi.go.kr
- 영화진흥위원회: https://www.kofi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