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55 오펜하이머 - 선택의 무게, 죄책감, 리더십, 원자폭탄의 아버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천재 주인공 이야기를 꽤 좋아합니다.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서사에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극장에 들어갔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원자폭탄을 만든 사람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보고 나니 그 선택을 감당해야 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였습니다.선택의 무게 — 천재도 피할 수 없는 딜레마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을 이끈 인물입니다. 맨해튼 계획이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비밀리에 추진한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으로, 수천 명의 과학자와 군인이 동원된 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 연구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는 뉴멕시코 사막 한복판, 로스앨러모스 연구.. 2026. 4. 23. 길복순 - 킬러액션, 미장센과 워킹맘 서사 넷플릭스에서 와이프와 맥주 한 캔씩 들고 앉았다가,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길복순,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게 와 닿았거든요. 세계 최강의 킬러가 딸 앞에서 쩔쩔매는 장면은 딸 둘 아빠로서 피식 웃으면서도 가슴 한 켠이 꽤 서늘했습니다.킬러액션 장르로 본 길복순의 완성도변성현 감독의 길복순은 장르 문법 면에서 꽤 정교하게 설계된 작품입니다. 영화에서 킬러들의 조직 MK ENT는 일종의 크라임 누아르(Crime Noir) 장르의 전통적 배경인 암흑가 조직을 현대 기업 구조로 치환한 설정입니다. 여기서 크라임 누아르란 범죄 세계를 배경으로 도덕적 모호함과 배신, 욕망을 탐구하는 장르적 흐름을 가리킵니다. 길복순은 이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대신, 살인 의뢰를 '작품', 조직을 '엔터테인먼트 .. 2026. 4. 23. 검은 수녀들 - 여성 서사가 완성한 K-오컬트, 금기와 선택 검은 사제들이 개봉한 지 10년이 됐습니다. 그 공백을 채우며 등장한 검은 수녀들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면서도 이번엔 수녀들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입니다. 저는 오컬트 장르를 꽤 좋아하는 편인데, 파묘도 사바하도 검은 사제들도 모두 재밌게 봤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개봉 소식이 뜨자마자 눈에 들어왔습니다.조용하게 조여오는 긴장감, 여성 서사가 완성한 K-오컬트솔직히 처음엔 송혜교라는 이름이 걸렸습니다. 세련된 이미지가 강한 배우가 수녀 역할을 얼마나 소화해낼까 싶었거든요. 직접 보고 나니 그 판단이 성급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영화는 처음부터 관객을 몰아붙이지 않습니다. 폐쇄적인 공간, 설명되지 않는 사건들, 불안하게 깔리는 분위기. 제가 느낀 건 이게 흔히 말하는 점프 스케어 방식이 아니라.. 2026. 4. 22. 돈 룩 업(Don't Look Up) - 블랙코미디 확증편향 관심경제 혜성이 지구로 돌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시청률과 SNS 좋아요 수에 더 집착하는 세상, 이게 영화 속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영화를 보는 내내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는 감각을 떨치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담 맥케이 감독의 은 그런 영화입니다. 재난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들의 반응이었다의 줄거리 자체는 단순합니다. 천문학과 대학원생 케이트(제니퍼 로렌스)와 지도교수 민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에베레스트산 크기의 혜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충돌까지 남은 시간은 단 6개월, 그리고 두 사람은 세상에 알리기 위해 백악관으로 달려갑니다.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대통령(메릴 스트립)은 지지율 계산을 먼저 하고, 언론은 혜성 충돌 소식보다 연예인 이별 스.. 2026. 4. 22. 오버 더 문 (색감, 상실, 잊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에 이 영화를 틀 때 아무 기대가 없었습니다. 주말 오후, 케이팝 데몬헌터스를 몇 주째 반복해서 보던 첫째 딸아이한테 슬쩍 다른 걸 틀어줬는데, 어느 순간 아이보다 제가 더 빠져 있더군요. 그게 넷플릭스 뮤지컬 애니메이션 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달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 색감이 모든 걸 말한다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압도됐던 건 이야기보다 화면이었습니다. 특히 주인공 페이 페이가 루나리아, 즉 달의 왕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회색빛 달 표면을 지나자마자 형광 계열의 색채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 장면은, 솔직히 그냥 눈으로 보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이 영화의 색채 연출은 색채 대비(Color Contrast)라는 시각 디자인 원리를 극단적으.. 2026. 4. 21. 콘크리트 마켓 - 무너진 서울, 공동체라는 말의 이중성 솔직히 처음엔 그냥 아류작이려니 했습니다. 재난 이후 배경에 비슷한 느낌의 포스터, 제목도 어딘가 비슷하고.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 "이건 결이 다른 영화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폐허 속에서도 시장이 열리고, 거래가 이루어지고, 권력이 생겨난다는 발상 자체가 꽤 날카롭게 박혔습니다.무너진 서울, 그래도 '마켓'은 열린다대지진 이후 모든 문명 인프라가 마비된 서울을 배경으로 합니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단순한 생존극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화폐 기능이 사라진 사회에서 사람들이 선택한 건 물물교환, 즉 바터 시스템(Barter System)이었습니다. 바터 시스템이란 화폐 없이 물건과 물건, 혹은 물건과 노동을 직접 교환하는 원시적 거래 방식으로, 현대 경제학에서는 화폐 이전 단계의 교환 경제.. 2026. 4. 21. 이전 1 ··· 5 6 7 8 9 10 다음